블로그 이미지
loveoclock
공대인, 특히 전자공학도들이 많은 정보를 얻어가길 바라며.. 책 냄새가 나는 블로그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otice

'독후감 방학 숙제'에 해당되는 글 76

  1. 2013.10.20 화해 - 틱낫한 저

독후감 대회 수상작입니다.


화해


 나는 꽤 오랫동안 얼굴에 난 편평사마귀로 고생을 했다. 편평사마귀는 흔히 생각하는 사마귀처럼 표면이 솟아있거나 색이 짙지 않은 대신에 옅고 넓게 퍼지는 속성이 있다. 이 피부병은 일단 퍼지면 박피술 같은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어렵고 그 균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면역성이 좋아져야 해결이 된다. 긴 시간 동안 이 질환을 앓아오면서 많은 치료 방법에 번번이 실패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사마귀의 색을 더 옅게 해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집중을 하기로 했다. 균을 완전히 색출하는 것은 어려워도 다행히 색을 옅게 하는 연고나 약은 있었다. 문제는 이런 연고와 약을 쓰면 편평사마귀는 얼굴에 더 넓게 퍼져 실제 상태가 더 악화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난치성의 질환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면역성을 키우는 건 아무래도 막연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했고 별 수 없이 계속해서 미봉책에 의존했다.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문제의 근본에는 가 닿지 못하고 그 표면에만 집착해 일만 꼬인 셈이다. 


 내 정신에도 편평사마귀 같은 존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항상 뜻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나의 불안감이 시기심에서 오는 불안, 미래가 불명확하다는데서 오는 불안 등으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이유 모르게 찾아오는 근심이나 목표 달성을 바로 목전에 둔 상태에서 느끼는 갑작스런 의심일 때도 있다. 얼굴에 생긴 질환의 정체를 기억하길 포기했듯이 이런 불안 앞에서도 단지 불편한 그 느낌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오락거리로 걱정을 잊어버리려고 하거나 몇 번 무시해보는 것으로만 일관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당장의 기분만 좀 풀어줄 뿐, 다시 그 상황에 놓이면 전보다 더 악화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결국 해결해야 할 것은 기분이 아닌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 앞에서도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는 이유로 역시 번번이 미봉책으로 일을 그르쳐 왔다. 


 틱낫한의 '화해'는 이런 심리적 갈등에 대응할 길을 모색한다. 저자는 책의 전반에서 오래 묵혀왔지만 차마 건드리지 못했던 심리 문제들을 반드시 직면할 것을 권한다. 사람의 정신에는 의식이 있는 반면 무의식도 있어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기억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릴 적 화재사고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생각했던 주변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술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갑자기 울컥하며 폭발하기도 한다. 모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경우다. 하지만 '생각하고 있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경우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문제'라는 범주로 의식적으로 구분 지었을 뿐, 실제로는 개인적으로 무척 중대한 문제들이 많고 오히려 의식으로 항상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은 주관적으로는 큰 의미지만 객관적으로는 사소해 그 일에 대응한다는 것이 멋쩍었을 수도 있고, 양상이 복잡하고 잘 해결이 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랫동안 꾸준히 영향을 준 문제들이어서 무척 심각하지만 그 심각성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해졌을 지도 모른다. 이 숙제들은 오히려 제대로 다루어졌어야 했지만 의식적으로 다루어지기를 거부당한 끝에 무의식에 자리 잡아싿. 우리는 이런 고민과 갈등이 계속 붙잡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혹은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에서는 이 중요한 숙제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언젠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그 다음 단계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들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있다. 이를 감지하고 있는 무의식은 이 난제를 해결해달라는 의미로 더더욱 존재감을 알리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한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응어리가 상냥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억압된 에너지가 그만큼 많기 때문에 수시로 불안을 동반하며 화로 표출되거나 나태함과 무기력함으로 왜곡되어서 나타난다. 그렇게 괴팍한 방식으로 나오지 않으면 의식적으로 무시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화나 무기력함이 감정을 흔들어 놓으면, 휘몰아치는 기분에 압도당해 이 기분을 잠재우는 데만 집중하게 되고 해결되지 못한 채 남는 응어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충동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갈등의 해결은 더더욱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틱낫한은 이런 상황을 토양과 씨앗의 관계라는 적절한 비유로 표현했다. 무의식은 토양과 같고 무의식에 감추어진 기억은 씨앗과 같다. 이 씨앗은 토양 속에 잠들어 있다가 때만 맞으면 싹이 터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이것을 외면하려고 이 싹을 잘라봐야 소용이 없다. 근원에는 씨앗에 있고, 그 씨앗을 품은 토양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싹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토양과 그 속에 씨앗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근원을 찾고 관리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토양에서 씨앗을 끌어오듯 이미 직시하기 어려워 감추어둔 고통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끌어오기 위해서는 다시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쾌하고 언짢은 감정들을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설령 그 불쾌함에 질려 무의식에 넣어둔 문제를 다시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왔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가 무의식 속에서 뜻 없이 일으키던 감정 요동과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틱낫한은 일상 속에서 조금씩 마음의 부정적 씨앗을 토양 바깥으로 끌어올려 에너지를 순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화제들을 익숙하게 일상 속에서 다루려면 가장 먼저 마음에 여유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한 마음이 무의식 속 어떤 고통스러운 기억에 기반 해 있는지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재현되는 감춰두었던 걱정과 실망에 관대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과소평가하기 마련이지만 실은 깊은 상처들, 사실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괴로워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으로부터도 가벼워져야 한다. 이런 마음의 여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는 명상과 호흡, 걷기를 통한 자기 치유가 있어야 한다.


 잊기로 했지만 실은 무척 중요했던 불쾌한 개인적 경험들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 기억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삐뚤게 만들었는지, 그 양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방식에 절제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 속 문제들은 그야말로 '무의식'에 있으니 이것이 실제 삶에 영향을 줄 때 꼼짝없이 그 영향을 곧이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의식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몰고 올 여러 영향들에 대해서 미리 대비하고 이를 억제할 수 있다. 틱낫한은 무의식의 세계를 더 깊게 들어가 너무 오래 되어 잊기 마련인 유년 시절의 고통도 기억하기를 바란다. 관계나 개인적 성취를 통해서 받는 상처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 위시되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버림받음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유년기이기 때문에 상처의 깊이가 다른 시기와는 남다르고 평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기초가 이 고통 받은 유년기에 만들어진다. 틱낫한은 개인적 고민이 어떤 유년기의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꾸준히 살펴 줄 것과 그것을 인내로 보듬어 줄 것을 강조한다.


 유년기의 상처에 직면하고도 더 내려가면 결국엔 모든 불안과 아픔에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죽고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곁을 떠나기 마련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이지만 이 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기에 어차피 겪는 불안전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이해하고 유한한 인생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는가에 집중할 수도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내면의 고통을 응시하고자 하는 명상을 통해서 불안의 배경을 끝까지 파헤치고 어린 시절, 마침내는 심지어 존재에 이르기까지 산재해있는 아픈 기억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신을 둘러 싼 것에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더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고, 그 배경 문제의본질과 크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 도달했을 때를 기다려 때에 맞게 기꺼이 힘을 쓸 수 있다. 무엇보다 미봉책에 기대지 않게 될 것이다. 미봉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결코 그 본질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틱낫한의 가르침을 확장하면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갈등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들에 대한 관심도 틱낫한이 강조한 본질을 보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잠시 갈등을 무마시키기 위한 미봉책만으로 그것이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중에 몰고 올 또 다른 갈등과 엇나감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도 '화해'의 가르침과 서로 통한다. 미봉책에 만족하지 않은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다면 조금은 어려운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응시하는 정책에 시민, 국민으로서 더 힘을 실어 줄 수도 있다. 


 틱낫한이 제시한 삶의 자세와 사고방식을 연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의식을 바라보기에는 의식마저 챙기기 바쁘고 본질을 본다는 이유로 과거를 되짚자면 머리 아픈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한동안은 뒤숭숭한 기분을 겪어야 했다. 도저히 성숙하고 분별력 있게 내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없었고 마음속을 탐구하는 건 미꾸라지가 되어 논두렁 물을 흐리는 것 같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화해해야 할 문제였다. 나의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문제라도 어쩔 수 없이 그것 또한 나를 구성하는 것이고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더라도 구원받을 대상 또한 세상이기 때문에, 돌고 돌아서라도 결국엔 무의식에 감추어 둔 나 자신, 그리고 세상과 화해해야 할 일이었다. 화해의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화해 후의 기쁨과 안도감이 그 과정의 고통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항상 말해준다. 지금보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성숙해져서 항상 화해하기를 원하는 여러 모습의 자아를 모두 끌어안고 마침내 타인에게도 그 지혜를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loveoc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