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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인, 특히 전자공학도들이 많은 정보를 얻어가길 바라며.. 책 냄새가 나는 블로그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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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에 해당되는 글 1

  1. 2013.10.13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저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가 그녀의 문학 동료들과 모여 서로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 해주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처음 발표된 후 지금까지 열렬히 해석되고 사랑받는 고전이 되었다. 세상 모든 훌륭한 이야기들이 그러하듯,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세월이 흘러도 주제의식은 낡지 않고 꾸준히 적용되며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원작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증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괴물은 끝까지 이름조차 갖지 못한 존재였다. 창조자 아버지의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으니 현실에서라도 그 성을 물려받은게 위로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극의 끝까지 가보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찬 월튼 선장은 바다에서 표류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구하고 박사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촉망 받는 젊은 과학자였던 프랑켄슈타인의 삶은 정도를 걸었었다. 점잖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으며 아름다운 약혼녀도 있었다. 그의 내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건 어머니의 죽음. 죽음이 너무도 당연하게 만연했던 시대, 젊은 천재는 생명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의도나 욕심도 없이. 처음엔 그저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었다. 월튼 선장이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극의 끝을 갈망하듯,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인류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인간의 생명 잉태라는 신의 영역에 도달하고픈 갈망에 사로잡힌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어 시체더미들을 모아 생명을 불어넣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정작 그 생명이 눈 앞에서 움직이자 빅터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도망가고 만다.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진 괴물은 홀로 숲 속에 숨어 사람들을 관찰하며 세상을 배워간다. 선한 의도와 순진무구한 마음씨를 가졌지만 시체더미로 만들어진 자신의 추악한 모습에 인간들은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왜 자신은 다르게 태어났는가 왜 이유 없는 학대를 받아야 하는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괴물은 자신의 창조주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지만 외면당한다. 괴물은 자신과 같은 여성 괴물을 한 명 더 만들어주면 죽을 때까지 조용히 행복하게 살겠다고 빅터에게 부탁하지만 빅터는 고심 끝에 결국 거절하고 분노한 괴물은 빅터의 주변 인물들을 한 명씩 살해하며 복수와 협박을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주제의식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과학문명과 자연의 대립이고 둘째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인간 본성과 주변 환경에 대한 탐구 정도가 되겠다. 세 가지 주제의식은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떼어넣고 말하기 힘들지만 하나씩 짚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름 내가 처한 군대라는 상황에 맞게 해석해보려한다. 훌륭한 이야기는 어느 시스템과 상황에 적용해도 그에 맞는 해석이 가능하기 마련이다.


첫째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갈등구조인 문명(과학)과 자연의 대립은 작가가 작품을 쓰던 당시 열광적인 발전의 시대였던 근세 유럽의 사조를 국외자인 여성의 시점에서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제의식은 그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더욱 넓고 깊게 팽창하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고 문명의 일부로 존재하게 된 지금, 이 갈등은 인류의 생존을 결정지을, 지구의 운명을 결정지을 가장 심각한 갈등이 되었다. 200여년 전에 쓰여진 <프랑켄슈타인>은 끝없이 팽창해나가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이성과 과학에 의한 자연 지배에 대한 일종의 경고문이었던 셈이다. 빅터의 연인 엘리자베스와 빅터가 창조한 괴물은 각각 빅터의 양쪽에 서서 그의 영혼을 잡아끌고 그는 둘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연을, 괴물은 과학의 창조물을 대표하는 것이다. 괴물이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 장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누구나 알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문명의 광기에 대한 추상적인 공포를 실체로 만들어 눈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문명의 창조물이 서서히 공포와 과기로 변해가는 동안, 메리 셸리는 끝없이 아름다운 자연 경광을 묘사한다. 울창한 숲과 여과 없이 떨어지는 태양, 달빛을 받으며 바스러지는 호수, 단단히 여문 열매들, 신비로운 북극의 풍광 등이 계속 공포와 절망의 이야기 결을 따라다닌다.


병사들의 군 생활 자체도 끊임없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 볼 수 있다. 분단국가와 전쟁의 위협이라는 상황은 문명의 광기가 불러일으킨 결과이고 이 결과물은 부자연스럽게도 모든 남자들을 군대라는 특수한 시스템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국가라는 시스템, 군대라는 시스템, 전쟁과 분단국가, 모두 문명의 산물이며 우리는 그 시스템 안에 살기 위해 원치 않아도 군인으로 2년을 살아야 한다. 군대가 힘든 것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고 권력 구조와 시스템 안에 순응하여 내가 아닌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대부분의 부대가 자연 속에 있다. 노루와 토끼가 뛰노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우린 전쟁을 준비하며 총과 대포들을 연마한다. 


좀 더 넓게 보면 현대인의 삶 자체가 끝없는 자연과 문명의 갈등이다. 태어나서 가정, 학교, 군대, 직장등 우린 끝없이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시스템의 일부가 되도록 훈련되며 살아간다. 소설 <데미안>에는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그 무엇. 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자기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건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이다. 모든 '인위'적인 시스템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삶에선 심지어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그 무엇'이 정말 내 본연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것인지, 그것이 시스템과 문명에 의해 삽입되고 요구되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인지 그마저도 헷갈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의문들은 자연스레 두 번째 주제의식인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는 서구 존재론의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인데 꼭 그렇게 종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가 신으로부터 왔다고 혹 누군가는 자연으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제 문명사회의 시스템의 영향력은 신이나 자연을 뛰어넘는다. 우리 모두의 존재는 자연이나 신보다는 문명사회의 피할 수 없는 직접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자라온 환경에서 받은 교육, 문명사회의 폭력과 쾌락들은 그냥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자아를 완성시키고 복제시켜 간다. 자신의 자아는 신 안에 더 많이 속해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종교나 신 역시 시스템 안에서 필요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고 복제되는 문명의 일부인 것이다. 즉, 우리의 창조주는 문명사회이며 우리는 그 창조물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처음엔 우리가 문명의 창조주였고 문명은 우리의 창조물이었다는 점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처음엔 자랑스럽고 찬란한 창조물이었던 문명사회는 스스로 점점 커져 결국엔 창조자가 탈출 할 수 없는 거대한 굴레가 되어 창조주들의 어머니인 자연을 파괴하고 창조주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환구조 자체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니 아이러니의 굴레는 다시 또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다. 


세 번째 주제의식이라 언급한 인간 본성과 주변 환경에 대한 탐구 역시 앞의 주제들과 바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프랑켄슈타인>은 백지와 같은 인간의 영혼이 주변에서 주어진 외압에 의해 어떻게 병들어 가는가를, 즉 괴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괴물은 사람과 시스템에 의해 탄생한다. 처음엔 한없이 여리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괴물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절망과 공포, 증오와 분노를 맛보며 서서히 괴물로 변해가는 데 그 과정은 괴물 본인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다. 사람들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존재에 무섭고 당황해 할 뿐이다. 그 괴물은 우리 모두가 서서히 잉태한 자식인데 말이다.


흔히들 '괴물'이라 하면 사람을 해치고 두렵게 하는 존재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그렇게 장르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린 살아가면서 수많은 괴물들을 만난다. 괴물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은 폭력을 낳는다. 앞서 현대인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연과 문명의 갈등이라고 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들어가는 시스템들, 모두가 거기에 잘 적응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소수가 아닌가. 학교에서 몇 프로나 승리자로 졸업을 하는가. 나머지 중 대부분은 그럭저럭 시스템이 굴러가게 지탱해주는 부속품으로 기능하며 살아가고 그 중 또 다른 소수는,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험한 절망, 분노, 폭력, 편견 등을 견디지 못하고 남다른 감수성과 자아 속에서 괴물로 변해간다. 적어도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세계관이 바라보는 괴물은 그러하다. 갑자기 일어나는 총기 난사 사건이나 연쇄 살인범 같은 거창한 괴물까지 아니라도 수많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 가정 폭력의 가해자들도 모두 사회의 괴물들이며, 그리고 그 폭력의 피해자들 역시 괴물로 성장해간다. 신체적 상처는 아물지만 정신적 상처는 연쇄적 반응을 일으킬 뿐이다. 우린 그 굴레를 바라보지 못하고 괴물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저 응징의 폭력을 휘둘러 그 굴레를 강화시킨다. 또 장애인, 동성애자, 성전환자, 외국인 노동자 등도 사회로부터 이유 없는 혐오와 차별을 받는 괴물들이며 더욱 일상적인 차원으로 내려오면 종종 핸드폰에 찍혀 인터넷에 유포되어 전국적인 질타를 받는 지하철 무개념녀, 막말녀 등도 우리가 정의의 이름으로 마음껏 짓밟는 괴물들이며 더 나아가 자퇴생, 미혼모, 고아 등까지도 우리가 정해놓은 '정상적인 삶'의 범위를 벗어났기에 사회의 편견과 폭력에 노출된다.


괴물은 엄연히 우리가 총자한 문명의 창조물이다. 시스템이 창조한 그 괴물이 시스템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휘두르는 폭력 속에서 또 아무도 모르게 괴물은 계속 창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사람들에게 상처 받고 폭력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살인귀로 변해간다. 그를 괴물로 몰고 가는 감정은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사랑의 부재, 외로움이었다.


군대 안에서도 우린 수많은 괴물들을 만난다. '인간 본성과 주변 환경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에 군대만큼 적합한 조직이 또 어디 있겠는가. 군대에 부적응한 관심병사도 이해 불가능한 괴물이며 규율과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후임도 이해 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괴물이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지키는 '시스템'을 벗어나 피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군대에 오면 나쁘게 돌변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야말로 백지와 같은 인간의 영혼이 주변에서 주어진 외압에 의해 어떻게 병들어 가는가를 눈앞에서 바라볼 수도 있는 곳이 군대이다. 그들 역시 시스템에 의해 탄생한 괴물들이다. 자연(자아)과 문명(군대) 사이의 싸움에서 자신이 진 것이다. 내면의 싸움을 포기하고 주어진 권력에 그냥 자아를 내어주는 편리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빅터는 결국 파멸하고 괴물 역시 파멸하고 마는데 이런 비관주의 자체는 장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며 '공포'를 불러일으켜 '각성'시키고 경고하는 태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비관적인 인생은 작가 자신의 연대기와 비슷하기도 하다. 메리 셸리는 17세에 아버지의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조숙한 소녀였다. 연인이었던 퍼시는 재능 있는 시인이었지만 유부남이었다. 둘은 불장난 앞에 놓인 건 8년의 유랑과 가난이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얼마 못 가 아이는 죽고 말았고 전 유럽 대륙을 떠돌며 집시처럼 긴 여행을 하는 동안, <프랑켄슈타인>을 완성했다. 그녀는 겨우 19세에 이 불멸의 고전을 처음 발표했지만 셋째 딸까지 줄줄이 죽음에 빼앗기는 불행을 겪었다. 메리 셸리는 10대 후반에 사로잡힌 첫사랑의 불같은 감정 이후 모든 걸 차례로 잃어버렸다. 그녀의 이런 삶은 소설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이다.


나의 글 역시 마치 문명과 시스템을 배척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 문명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랜 기간 발전, 진화시켜온 (적어도 현재까지는) 최상의 결과물이다. 잘 가꾸기만 하면 정말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찬란한 유산인 것이다. 다만 역으로 우리가 창조한 시스템과 문명에 우리가 먹히지 않도록, 더 이상 괴물이 탄생하지 않도록 모두가 '자연'과 '문명'을, '자아'와 '시스템'을 인식하고 인지하여서 건강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살며시 얼마나 자연과 자아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가. 문명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외모를 가질 것인가 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가. 그렇게 문명과 시스템에만 몰두하며 살다보면 자연은 잊혀지고 자아는 지워지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들은 곳곳에서,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우리 삶의 터전 안쪽에서부터 탄생하는 것이다. 갈수록 기이해져가는 자연재해들과 가속되는 환경오염, 더욱 끔찍해지는 범죄들과 양극화되어가는 삶의 질은 모두 문명의 창조물이며 그들은 이미 그 자체로 괴물이다. 그 괴물들은 우리와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문명을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이며 그 모든 건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치광이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대한민국 공군에서도 이런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기 생활관, 선진병영생활을 위한 다양한 개혁들은 모두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덕분에 우리 부대만 하여도 악폐습은 사라졌고 군 전체에서 인명 사고도 많이 주렁ㅆ다고 한다. 더 이상 자살이나 타살을 하는 불행한 괴물들을 양성하지 않기 위해, 약자와 소수자들을 챙겨주기 위해 노력하는 시스템의 모습에서 나는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힘은 놀랍게도 시스템보다 크다. 아무리 교육 제도가 엉망이어도 따뜻한 선생님 한 분의 힘이 아이들에겐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쳤음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창조한 문명. 우리가 책임지고 끝까지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멈추는 순간, 우리도 빅터 프랑켄슈타인처럼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우리의 자식, 창조물에게 먹혀버릴지도 모른다.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로 변하기 전, 두려움과 고독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고요한 호숫가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흘리던 이름조차 없던 그 존재를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 존재는 무시무시한 비극을 잉태하는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우리의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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